계혁주의세계관공부하기.txt

05 Apr 2007

나는 그동안 수많은 총여학생회의 주장을 담은 선전물을 간과해왔다. 반면 최근에 총여학생회의 위상 변화를 시도하는 총학생회의 노력들을 보면서, 왜 나는 그동안 총여학생회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제기도, 그에 따른 행동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느껴진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보면서, 그저 ‘아 그건 그런것 같은데?’, 하고 한때의 상념으로 흘리는 생각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는데로 살지 않으면, 사는데로 생각하게 된다”는 선배들의 말처럼,, 그렇게 나의 인식들을 일순간의 느낌으로만 제한시키는 동안, 나는 세상이 그저 흘러가는데로 두고 있었고, 나의 생각도 그런 큰 물결 앞에 적응시켜나가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시고,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시는지 알아야겠다. 물론 결국 세상은 하나님이 바꾸신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을 다 알던 모르던 하나님은 일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신 성경속의 인물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의 세계관과 소명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을까.

소명이나 세계관이라고 말하니 거창하게 들리긴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쪽에서의 노력이 강조된다는 생각에 싫어할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그런 경향이 다분한다. 나는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며, 하나님의 일하시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주장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소중한 관계를 맺고계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 하나님이 무엇을 느끼시는지에 대한 관심은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소명과 세계관은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영적이다.

예수님은 구약에 주어진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나아가 예수님은 율법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당시의 큰 사건이나, 권세있고 없는 자들의 행동,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셨다. 한편 바울과 사도들은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비추어 복음을 구체화하였으며, 바울은 헬라문화를 기반으로 지적으로 우월감에 빠져있는 로마와 그리스 사람들에게 구체화된 복음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마음을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전달하시기도 하신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많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했으며, 신약에서도 종종 그런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런 방법을 사용하실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을 통한 계시는 결코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된다. 디모데 후서 3장이나 시편 119편처럼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대한 중요성을 표현한 부분을 제외하고서라도 많은 구절 들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들어 사용하시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 단순히 나의 가치를 끓어올리기 위한 욕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대학생활 동안 수많이 만났던 지적이며 영적인 대가들의 말소리를 떠올리며 열등감에 빠질까 걱정이다. 그리고 그 열등감이 결국 우월감으로 변하여 세상을 깔보고 정죄하는 일을 하게 될까 두렵기도하다.

우월감이나 열등감 같은 것들은 신학을 학문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다. 신학이 현재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실 뿐만아니라 현재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말씀에 비추어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삶을 바꾸게 되며, 신문에 나타난 수많은 사건 속에서나 오늘 학교나 직장의 구성원들 에게서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느끼며 감사하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미전도 종족을 향해 선교 역사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지.

명분 없는 전쟁 속에 고통과 갈등, 분노만 쌓여가는 이라크나, 수많은 내전 국가들을 보며 하나님은 교회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자유무역협정과 노동시장의 유연화 속에서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배고픔으로 누구보다도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우리 민족 북한을 향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신지. (그들은 양극화 이야기를 꺼낼 기운도 없고, 열등감을 가질지도 모르는 나라들에 대해서 들어볼 기회도 없는데-)

음란함, 자기 우상화, 안락한 삶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우리 문화에 대해서는 비판하면서도 이것들이 반영된 실재 사건이나 선택의 순간이 닥치면, 무지하고 무력한 우리 모습에 대해서는 어떠하신지.

그밖에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들과 수많은 사건들을 향해 어떠하신지.

나보고 세상을 변혁시키라고 하실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하나님이 이루어 내실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이 어떠한지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는 분명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천년설과 후천년설이 다르다고 했던가. 종말론도 공부하고 리차드 니버와 아브라함 카이퍼도 공부해야할지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나는 이런것들을 조금씩 구체화해가며 크그림과 작은 그림들을 그려가고 싶다. 진짜 하나님과 나와 세상의 모습과 조금은 혹은 많이 다를수도 있다. 무엇이 틀렸는지 아는 특권이 그것을 그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을 알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후에 나는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지도 삼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가다보면 그림이 어디가 틀렸는지 또 알게되고,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지도를 그리도록 동기부여하고 옆에서 도와줄 수도 있게된다면 좋을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는 실천할 때이다.

2007-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