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조차도 바꾸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김용의 선교사님)
아직도 나는 100% 완벽한 정품소프트웨어를 사용자가 아니다. 정품이 아닌 포토샵, 플래시, 드림위버가 아직 내 컴퓨터에는 깔려있다. 일러스트와 한글2007의 설치 파일이 내 컴퓨터에 있었는데 그동안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다른 사람과의 업무를 위해서나 의사소통을 위해서 필요하다든지, 리눅스 진영이나 공개 소프트웨어들 중에 특정 작업을 위해 별로 대안이 없어보이는 것들이다.
구지 불법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자면 한글은 한글뷰어와 오픈오피스를 사용하면 되고, 드림위버는 이클립스를 사용하면 최상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작업이 가능하다. 그런데 포토샵과 플래시가 문제다. 포토샵은 GIMP라는 GNU진영의 소프트웨어가 있지만 아직 포토샵 수준을 따라오지 못한다. 플래시 같은 경우는 아에 대안 프로그램이 없다.
포토샵과 GIMP의 예를 들어보자. 두 프로그램간의 인터페이스가 다른 것은 적응하면 되는 것이므로 일단 차치하기로하자. GIMP에서는 레이어 단위로 스타일을 지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효과를 되돌리거나 수정하는 기능이 제공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텍스트에 그림자 효과를 준 경우 포토샵에서는 텍스트를 변경하면 알아서 변경된 텍스트에 그림자가 지정되는 반면, GIMP에서는 그림자에 해당하는 레이어가 따로 생겨서 텍스트를 변경하여도 그림자는 이 전의 텍스트에 해당하는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한 편 GIMP에서는 미리보기 기능이 많이 제한되어 있어서 여러가지 효과를 실재로 적용해보기 전에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없어서 업무의 비효율성을 가져온다.
(플래시의 경우에는 대안 소프트웨어를 찾아보았는데, 예전에 개발이 되다가 지금은 잠자고 있는 리눅스 플래시와 플래시를 생성하는 자바 SDK 정도가 였다.)
나는 디자이너도 아니고 RIA개발자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프로그램들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홈페이지 작업을 하나 하고 있는데, 홈페이지의 퀄리티와 팀 안에서의 의사소통과 협력을 위해서 이들 소프트웨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나는 무단 복제 프로그램 사용에 대해 반대하며, 저작권을 옹호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조차 완전히 무단 복제 프로그램을 끊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무단 복제 프로그램 사용을 강제로 금할 수 있는 자격이 지금의 나에게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공개프로그램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가 나는 비전공자에게 바른 길을 강요한다면 나에 행동은 가히 예수님에게 지적당한 바리새인들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고 틀린 것을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을 눈 꼭 감고 없는 것처럼 숨길 수는 없다. 그래도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하는가? 이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일도 아니며, 예루살렘회의에서 사도들이 가하다고 결정한 것도 아니다.
소프트웨어의 복제와 자유로운 사용이 본질적으로 나쁜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직은 명확하지 않은것은 사실이다. 소프트웨어의 공공재화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GNU 프로젝트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나도 이런 주장들이 그 당위성 차원에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아직은 소수의 의견일 뿐이다. 합의도 없이, 주는 사람도 없이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빼앗은 것이고 8계명 위반이다.
나는 이 문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혹시나 내가 물에 빠진 가축을 구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 먼저 집고가야할 내 양심의 문제이기에 중요하다. 적어도 나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이다.
나부터 하나씩 하나씩 고쳐가자. 조금 힘들더라도 공개 소프트웨어 사용에 익숙해지자.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도 새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일을 부탁한다면 내가 가진 소프트웨어 자산으로 가능한가 따져보자. 할 수 없다면 지혜롭게 거절하자. (이번 홈페이지 건은 회사에 가용한 소프트웨어를 요구하거나, 다른 업체에 대여하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았어야 했다. 그런 방법도 없다면 홈페이지의 퀄리티를 낮추거나 거절했어야 했다.)
내가 바로서야 할 이유는, 소극적으로 내가 누군가 앞에서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권이 생긴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릇된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지는 말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서야 소프트웨어 공공재화나 GNU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자격도 생긴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사회적 합의가 히틀러 정권 같은 완벽히 불의한 것이 아닌 이상, 지금의 사회적 합의를 나조차도 지키지 않는다면, 또 다른 사회적 합의를 생산하고 권할 자격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